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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으로 할 수 있는 많은 일들

또시락 2026. 2. 5. 21:19

 
 "레이건..."

암울한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완벽한 함정을 팔 수 있었던 거지? 믿을 수 없어... 난 조금도 의심하지 못했다고!"
 
 목소리의 주인 레이프 매스터스는 압도당한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그리고 이에 반응한 슈퍼빌런_닥터 스컬핑거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매끄러워서 거의 비웃는 소리처럼 들렸다.
 
 "세상에나, 그녀는 그림자 정부의 천재 과학자야! 그게 놀랍니?"
 
 - 심지어 레이건 리들리, 그 여자는 '닥터 스컬핑거'를 잡은 승자잖아? 우리끼리 수 십번하고도 수 백번을 반복한 게임인데... 정작 마무리를 지은 건, 마지막 단 한 판에 참여한 그 애였어...

"내 눈에는 보여, 그녀가 가진
보기 드문 대악당의 자질이... 악착같은 면이 확실히 요즘 애들 같지는 않지? 어쩌면 그렇게 귀한 원석인지! 오랜만에 마음이 흡족했어. 호호호."
 
 "맙소사! 어떻게 그런 말을!! 널 잡은 건 나잖아...!"
 
 "글쎄, 레이프 요원께서는 천재 과학자의 도움이 없었을 때에도? 음, 그러니까 어떤 숙녀분이? M16의 천박한 스파이 뗀석기와 차원이 다른 도구를 제공해주기 전에도...? 그의 숙적을 사로잡았던 적이 있었던가? 이런, 기억이 나지 않는걸... 이제 나도 나이가 나이여서 말이지, 오호호호!"
 
 "오, 제발, 당신까지 그렇게 말하지마! 애초에 그녀가 나보다 지능적이라는 사실을 의심한 게 아니야."

- 난 이미 충분히 성중립적인 사람이라고!

" 그냥 그렇게나 똑똑한 여자친구가 날 속이고, 배신한 뒤, 차버릴 줄 몰랐을 뿐인 슬픈 미남이야!"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스컬핑거는 다시금 호호호, 웃었다.
 
 "너도 참! 스스로 잘난 걸 알고 있어서 탈이야!"

 스컬핑거는 한참을 괴롭게 웃다가, 결국 상반신을 의지하던 쇼파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리모컨을 찾아, 작은 버튼을 누른 후에 그것을 자신의 허리춤에 숨겼다. 그러자 레이프를 구속하고 있는 금속 십자가가 회전을 시작했다. 구속장치는 스컬핑거의 지척에 와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 레이프는 거꾸로 서서 그의 숙적을 바라보는 상태였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스컬핑거는 손을 움직여 레이프의 허리와 가슴 사이를 매끄럽게 쓸어내리더니, 이윽고 나비 넥타이를 찾아냈다. 노신사는 두손에 날개를 쥐고, 청년의 얼굴을 당겨 키스했다. 스컬핑거는 이 모든 일을 하면서 (잘 보란듯이) 어깨의 능선을 낮추어 주었고, 레이프는 이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 귀여운 레이프 매스터스, 실연을 당하다니 슬프겠구나?
 
 "그래도 다행이지? 네 취향인 사람이, 아직, 여기, 남아있잖아."

 스컬핑거는 레이프의 얼빠진 표정을 감상하면서, 그의 도톰한 입술을 약하게 꼬집어 주었다.
 
 "세계정복을 꿈꾸는 미친 과학자."

 양손으로 제 허리를 쓸어내리면서 다시 리모컨을 찾아낸 스컬핑거가 말했다.
 
 "대신 이번에는 더 사악하고, 널 좋아하는 버전이야... 추가 옵션이 어때? 마음에 들어? 응?"
 
"...그럼 나한테 뭘 할 거야?"
 
 - 삑, 레이프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둘의 사이에서 신호음이 울려 퍼졌다. 레이프는 반사적으로 구속구를 확인했지만, 그의 손발을 단단히 묶여놓은 금속 족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곧 시선이 원래자리로 돌아왔을 뿐이다.
 
"오, 실망하지마. 자기...", "그래도 구속당하는 걸 싫어하지 않지?"
 
 스컬핑거가 부드럽고 달콤한 어조로 제 어깨를 쓰다듬자, 레이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 자기, 라니!

둘 사이에 어떤 텐션이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지켜본 이들 모두가 이게 도대체 무슨 분위기인지를 물어볼 정도였으니 본인들은 오죽했겠는가. (심지어 레이프는 스컬핑거도 이 수상한 텐션을 알고 있음을, 그러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마저도 알고있다는 사실까지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숙적을 향한 애증이라고 둘러대었지만, 사실은 정말로 스컬핑거를 싫어할 수 없었다. 레이프는 사악하고 우아한 매력에 항상 호기심을 느꼈고, 사적인 시간을 즐기고 있는 닥터 스컬핑거의 모습을 상상했다. 물론 두 사람은 그 호기심을 갈망으로 연장시킬 수 없는 관계였다.
서로의 빌런과 히어로였으며, 상대의 정체성에 의존하기 때문에 더 완벽했다. 숙적이란 운명과 비슷했다. 질서의 편에 서있던 레이프는 그 룰을 먼저 배신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섹시한 슈퍼 빌런의 포로가 된 지금이라면, 이 순간을 조금쯤 즐겨도 괜찮지 않을까...?
 
 레이프가 행복한 망설임 속에 빠져버린 사이, 스컬핑거는 이전 그 쇼파로 돌아가 숙적의_시시각각 심각해지는_표정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재미있는 남자야.'

 이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완전히 내것으로 삼자니 부담스럽고, 남주기에는 아쉬운... 그런 껄끄러움이 남았다. 좋아하지만, 책임지기 벅차고 징그러운... 그래서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드는 포로와의 동거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입양할까?"
 
 쉬지 않고 종알 거리던 레이프는, 언젠가 레이건 리들리가 스컬핑거에게 하소연했던 내용과 결이 같은 질문을 막 쏱아낸 참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스컬핑거의 사악한 고양이가 나타났다. 새하얀 털뭉치는 재빠르게 무릎위로 올라오면서 스컬핑거와 레이프 사이를 가르고, 얼간이 쪽을 향해 하악질 했다. 마치 더는 못 들어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니이, 아이는 너랑 얘면 충분해."
 
 "오, 그럼 우리는 딩펫족이구나!"
 
 "제발 그렇게하자, 달링. 난 사람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없거든."
 
 스컬핑거가 장단을 맞춰주자, 그 맞장구에 힘입은 레이프는 망상에 가까운 계획을 또다시 종알거렸다. 스컬핑거의 사랑스러운 고양이는 무척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였는데, 한참을 웅얼웅얼거리면서 레이프를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주둥아리에 지친 것인지 고양이는 결국 제 아빠의 무릎 위에 겨우 자리를 잡고 안착했다. 그리고 화산 기지에서 평화롭게 살아온 한 사람과 한마리의 고양이는 동시에 생각했다. 시끄럽다고.
 
 - 아, 역시 후회할 짓을 저지른 걸까?

스컬핑거는 약간의 후회를 느끼며, 제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사랑스러운 털뭉치를 쓰다듬었다.